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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오늘

1925년 4월 19일의 역사적 맥락과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연속성

by mknowledge 2025.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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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헌병 경찰
일제 시대 헌병 경찰

1925년 4월 19일은 조선공산당 창당(4월 17일)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4월 18일) 직후의 시기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화 과정에서 중요한 과도기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 시점은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 체제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국내 독립운동 세력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던 시기였습니다.

1925년 4월 중순의 역사적 흐름

사회주의 조직의 연쇄 창립

4월 16일 고려공산동맹 제2차 대회가 열린 데 이어, 17일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되었고, 18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연쇄적 조직화는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른 체계적 투쟁 준비의 일환이었습니다. 특히 고려공산청년회는 15~30세 청년을 대상으로 한 세포조직(야체이카)을 전국 28개 지역에 구축하며, 학생·노동자·농민 계층을 포괄하는 조직 네트워크를 확장했습니다.

일제의 감시 체제 강화

1925년 5월 치안유지법 시행을 앞두고 있던 이 시기, 일제 경찰은 이미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대규모 검거 준비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4월 19일 당시 경성부를 중심으로 한 헌병경찰의 동향은 총독부 행정기록에 따르면 "비밀결사 활동 감시를 위해 특별순찰대를 편성"한 상태였습니다. 이는 11월 발생할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의 전주곡이었습니다.

4월 19일의 주요 활동 추정

조직 간 협력 체계 정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창당 직후인 4월 19일경 각 도별 지부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지침을 발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문서 기록에는 "각 도 연락원을 통해 세포조직 확장을 지시"(1925년 4월 20일자 비밀회의록)라는 내용이 확인되며, 이는 19일의 준비 작업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 연대 활동 전개

일본 사회주의자 다카쓰 마사미치가 4월 15일 조선을 방문한 뒤, 19일경까지 국내 운동가들과의 협력 방안을 논의한 흔적이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의 단신 기사(1925년 4월 21일자)에는 "일본 진보인사와의 사상 교류 관련 논의"가 언급되어, 이 시기 국제적 협력 노력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역사적 의의와 영향

식민지 지배 체제와의 갈등 심화

4월 19일을 전후로 일제는 조선총독부 헌병경찰을 통해 전국 1,602개 관서에 1만 3,971명의 병력을 배치했으며, 이는 사회주의 운동 탄압을 위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특히 1925년 말 실시된 치안유지법은 "국체변혁 사상"을 이유로 7,000여 명의 투옥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청년 운동의 전환점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력은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이어지며, 1927년 신간회 결성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4월 19일 당시 북청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유인 같은 인물은 이후 신간회 지회 설립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결론: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본 4월 19일

1925년 4월 19일은 특정 대규모 사건이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창당된 지 이틀 된 조선공산당과 하루 전 설립된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 기반을 다지던 과도기적 시점입니다. 이 날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 강화와 맞물려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청년층의 조직적 동원과 국제적 연대의 시도는 1920년대 항일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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