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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과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

by mknowledge 2025.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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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1925년 4월 17일은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한 날입니다. 이날 서울 황금정(현 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코민테른(공산국제)의 지침에 따라 국내 사회주의 세력이 통합된 정당을 수립하려는 시도의 정점이었으며, 이후 한국 독립운동과 좌익 운동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역사적 배경

국제공산주의 운동과의 연계

1920년대 초반 소련의 코민테른은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당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1924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조선문제결성서'를 채택하며 통일된 조선공산당 결성을 촉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오르그뷰로(조직국)가 구성되어 국내 화요회(火曜會)와 협력하며 창당 준비를 진행했습니다. 화요회는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유래된 명칭으로, 김재봉·김찬·윤덕병 등이 주도한 사상단체였습니다.

국내 사회주의 세력의 분열과 통합 노력

당시 국내 사회주의 운동은 서울파·이르쿠츠크파·상하이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1923년 고려공산동맹 창립 이후 각 파벌 간의 통합 논의가 지속되던 중, 1925년 4월 16일 서울파 전위조직인 고려공산동맹 제2차 대회에서 김유인 등이 중앙위원으로 재선되며 통합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다음 날 있을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전초전 역할을 했습니다.

1925년 4월 17일 창당대회의 진행

비밀리에 진행된 창립 과정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전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를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아서원에서 열린 창당대회에는 김재봉·김낙준(김찬)·김약수·조봉암·박헌영 등 19명이 참석했으며, 이 중 15명이 화요회 소속이었습니다.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의제가 논의되었습니다:

  1. 조선혁명의 과제: 민족해방혁명과 반제국주의혁명을 핵심 목표로 설정
  2. 조직 구조: 책임비서제 도입과 함께 조직부·정치경제부·선전부 등 6개 부서 설치
  3. 국제 연대: 코민테른 가입 신청 및 활동 보고 체계 수립

초대 지도부 구성

창당대회에서 김재봉이 초대 책임비서로 선출되었으며, 주요 간부로 조봉암·박헌영·김찬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코민테른과의 연계를 위해 조동호와 조봉암을 모스크바로 파견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창당 직후의 조직 활동

고려공산청년회 설립

창당 다음 날인 4월 18일에는 청년층을 규합하기 위해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5세부터 30세까지의 청년을 대상으로 한 이 단체는 전국 28개 세포조직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박헌영이 초기 지도부를 이끌었습니다.

사회운동자동맹 발기

동시에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취지서가 발표되어 사상 순화와 조직 강화를 통한 전국적 연대 체제 구축을 선언했습니다. 이 문서는 진도 출신의 박종협 등 지역 활동가들에게까지 배포되며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한계

일제 강점기 저항 운동의 새로운 장

조선공산당 창당은 기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차별화된 사회주의 기반의 조직적 투쟁을 본격화한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1926년 6월 발표된 『불꽃』지의 「조선공산당선언」에서는 토지 개혁·노동권 보장·여성 권리 신장 등 40개 항목의 구체적 강령을 제시하며 현실 개혁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조직 분열

창당 직후인 1925년 11월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습니다. 1928년까지 4차례에 걸친 해산과 재건 과정을 겪으며 내부 이념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1945년 해방 직후 남북 분단 체제에서 서로 다른 노선으로 분화되기에 이릅니다.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긴장 관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활동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했지만, 동시에 한국 특유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야기했습니다. 이는 이후 항일 무장 투쟁 노선과 합법적 투쟁 노선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교 관점: 동시기 국내외 사건과의 연관성

사건 일자사건 내용역사적 영향
1925.03.12 쑨원 사망 중국 국민당 내 공산당 협력 체계 약화
1925.05.12 치안유지법 확대 조선공산당 활동 본격적 탄압 시작
1925.06.18 히틀러 『나의 투쟁』 출간 극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대두
1926.04.10 정우회 창립 사회주의 계열 사상 단체 재편
 
 

이 표에서 보듯, 조선공산당 창당은 전후 국제적 파장을 고려한 전략적 결정이었으나 식민지 현실 속에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1925년 5월 치안유지법 확대로 인해 창당 1개월 만에 조직 기반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결론: 역사적 교훈과 현대적 함의

1925년 4월 17일의 조선공산당 창당은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민족 해방과 사회 변혁을 동시에 추구했던 복합적인 실험이었습니다. 비록 일제의 탄압과 내부 갈등으로 단기간에 해체되었지만,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다음과 같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 이념적 다양성 확대: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구별되는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적 대안 제시
  2. 조직화의 모델: 비밀 결사 체제와 합법적 전선 조직을 결합한 이중전술의 시초
  3. 국제 연대의 경험: 코민테른을 통한 세계 공산주의 운동과의 접속 시도

이날의 사건은 오늘날 남북한의 이념적 분단을 이해하는 역사적 뿌리이자, 국제정세와 국내 운동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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