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오늘, 1925년 4월 15일은 일제강점기 조선 언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이날 천도교 기념관에서는 전조선기자대회가 개막되어 3일간 열렸는데, 이는 당시 조선인 기자들이 단결하여 언론 자유를 외치고 일제의 탄압에 맞서기 위한 첫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이 행사는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 식민지 현실 속에서 조선 민족의 목소리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 계열의 비밀결사 활동과도 연결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1. 조선기자대회의 개최 배경과 준비 과정
1920년대 초반 조선 언론계는 일제의 엄격한 검열과 신문지법, 출판법 등의 악법으로 인해 극심한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1921년 결성된 언론인 모임인 무명회가 1925년 1월 '전조선기자대회' 개최를 제안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주요 신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습니다:
준비 단계 주요 내용 | 세부 사항 |
---|---|
참가 자격 | 조선어 신문·잡지 소속 기자(친일 매체 포함) |
준비위원회 | 33명 구성(조선일보 7명, 동아일보 6명 등) |
교통 지원 | 경성역에서 지정 여관까지 무료 자동차 5대 운영 |
홍보 전략 | 1925년 4월 3일 동아일보에 대회 광고 게재 |
특히 주목할 점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까지 참여하도록 강요받은 점입니다. 이는 일제가 대회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의도였으나, 오히려 다양한 성향의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대회 개막식과 주요 의제
1925년 4월 15일 오전 11시, 군악대의 연주 속에 천도교 기념관에서 개회식을 가진 조선기자대회는 463명의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진행을 보였습니다:
2.1. 개회식 주요 인물 및 논의
- 의장 : 이상재(조선일보 사장)
- 부의장 : 안재홍(조선일보 주필)
- 첫날 결의안 : 언론 권위 신장, 출판 법규 개정, 대중운동 촉진 등 5개 항목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
- 대회 개막일 신문 기사 제목에서 인용
2.2. 사회주의 계열의 도전
개회식 당일 사회주의 성향 기자들이 의도적으로 소란을 일으키며 회의 진행을 방해했습니다. 이들은 조선공산당 창립을 위한 연막작전으로 대회를 이용했으며, 실제로 4월 16일 고려공산동맹 대회, 17일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비밀리에 개최되었습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대회 참가 기자 중 약 50%가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점에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3. 역사적 의미와 영향
3.1. 언론 자유의 상징적 투쟁
대회는 일제의 신문지법 제12조(사전검열), 제23조(정간처분) 등 악법에 맞서 다음과 같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결의문 채택 : 언론의 사회적 역할 강화, 법규 개정 요구 등
- 연대 강화 : 지역별·사상적 차이를 넘은 협력 체계 구축
- 국제적 관심 :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의 대회 소식 보도
3.2. 독립운동과의 연계
대회 기간 중 비밀리에 진행된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은 이후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이어지며, 이는 치안유지법 적용의 첫 사례가 되었습니다.
4. 일제의 탄압과 대회 이후
4.1. 경찰의 감시와 방해
- 신철 사건 : 대회 전날 준비위원 신철이 '거주규칙 위반'으로 구금
- 현장 감시 : 정사복 경찰 50여 명이 회의장 주변 배치
- 결의문 검열 : 5개 결의안 중 2개 항목 보도 금지
4.2. 장기적 영향
구분 | 내용 |
---|---|
언론계 | 1925년 5월 사회부 기자 임금 인상 요구 운동 전개 |
사회운동 | 1926년 6·10 만세운동 때 언론인 주도적 역할 |
법적 후속 | 1927년 신간회 창립에 기자 다수 참여 |
5. 100년 후의 교훈
1925년 조선기자대회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 언론의 사회적 책임 :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진실 전달에 헌신
- 단결의 중요성 : 이념 차이를 넘어 공동 목표 추구
- 법적 억압에 대한 경계 :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진 사상 통제의 연속성
이 대회는 비록 일제의 감시와 내부 갈등 속에서 완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3·1운동 이후 가장 조직적인 민족운동의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2025년 현재, 디지털 시대의 언론이 직면한 새로운 도전에 맞서 100년 전 선배 기자들의 정신을 재조명해야 할 시점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2025.04.14 - [100년전 오늘] - 1925년 4월 14일: 역사의 다면성을 품은 하루
1925년 4월 14일: 역사의 다면성을 품은 하루
1925년 4월 14일은 세계사의 다양한 분야에서 중대한 사건들이 발생한 날입니다. 이날의 사건들은 정치, 스포츠, 예술 분야에서 각기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며, 당시 사회적 배경과의 연관성을
mknowledge.tistory.com
'100년전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과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 (0) | 2025.04.17 |
---|---|
1925년 4월 16일의 역사적 순간: 고려공산동맹 2차 대회와 한국 근대사의 흐름 (0) | 2025.04.16 |
1925년 4월 14일: 역사의 다면성을 품은 하루 (0) | 2025.04.14 |
1925년 4월 13일의 역사적 조명: 한국사와 세계사의 교차점 (0) | 2025.04.14 |
1925년 4월 12일: 치안유지법 공포와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 (0) | 2025.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