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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오늘

1925년 4월 10일: 조선사편수회 설립의 시작과 역사 왜곡의 씨앗

by mknowledge 202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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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편수회에서 편수한 조선사

일본의 식민 통치 전략과 역사 조작

1925년 4월 10일,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는 「조선사편찬회관제 제정의 건」을 각의에 상정했습니다. 이는 6월 6일 공식 출범하는 조선사편수회의 토대가 된 행보로, 식민지 조선의 역사 해석을 일본 제국에 유리하게 재구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계획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15년간의 통치를 정당화할 역사적 근거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가토 다카아키의 제안은 단순한 학술 기구 설립을 넘어, 조선 민족의 정체성을 와해시키는 정치적 프로젝트였습니다. 1925년 5월 6일 「유신사료판찬회관제」가 법제국장에게 송부되며, 일본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사료 편찬 체계가 식민지 역사 서술에 적용되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의 운영 메커니즘

이 기구는 총독부 직속으로 운영되며, 일본인 학자 23명과 조선인 협력자 7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요 업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 주요 사서의 일본어 번역
  2. "임진왜란"을 "임진조선의 역(役)"으로 개칭하는 등 용어 왜곡
  3.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화로 분류하며 고대사 단절 강조

특히 1926년 발간된 『조선사』 35권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 근대화의 은인"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1945년 해방 시점까지 22년간 지속되며, 총 7,893쪽 분량의 식민사관이 체계화되었습니다.

역사적 영향과 학계의 저항

1925년 4월 10일의 결정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27년 안확이 『조선사연구』를 발간하며 독자적인 역사 해석을 시도했고, 1934년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초』에서 일제의 역사 왜곡을 정면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모두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국제적 맥락에서의 의미

이 시기 일본은 대만에서도 1928년 대만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며 동일한 역사 조작 전략을 적용했습니다. 이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의 전초 작업이었으며, 1942년 대동아학술원 설립으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결론

1925년 4월 10일의 조선사편수회 설립 움직임은 단순한 학술 활동이 아니라 식민 통치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구축한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해방 후 한국사 학계가 20년간 식민사관 청산에 진력해야 했던 근본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역사 갈등의 씨앗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역사 연구의 정치적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이날의 사건은 권력과 지식의 위험한 결탁 사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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