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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오늘

1925년 5월 1일, 100년 전 오늘의 국내외 주요 사건

by mknowledge 202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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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5월 1일, 100년 전 오늘의 국내외 주요 사건

1925년 5월 1일은 일제강점기 조선과 국제사회에서 노동운동과 민족운동이 교차하던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날 조선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 신장을 위한 대규모 투쟁이 전개되었고, 중국 상하이에서는 반제국주의 운동의 전조가 나타났으며, 세계 각지에서는 메이데이 정신이 확산되는 가운데 식민지와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본고는 100년 전 이날의 국내외 사건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조명합니다.

1. 일제강점기 조선의 5월 1일: 노동절 투쟁과 어린이날

1.1 조선노농총동맹의 메이데이 투쟁

1925년 5월 1일 조선노농총동맹은 "8시간 노동제 확립", "최저임금 제정", "일본 농민의 조선 이민 반대" 등 5대 투쟁구호를 내걸고 전국적 행동을 전개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인천·대구·강경 등지에서 노동자와 농민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 경찰은 집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50여 명을 검거하는 등 강경 대응을 펼쳤습니다. 특히 인천노동총동맹은 "노동자 해방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며 계급적 각성을 촉구했고, 이는 192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1.2 어린이날의 초기 형태와 민족계몽

색동회 창립 기념 사진
1923년 5월 1일 찍은 색동회 창립 기념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방정환.

방정환을 중심한 색동회는 1923년부터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진행했습니다. 1925년에는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1,000여 명의 어린이가 참여한 가운데 동화구연대회와 가두행진이 열렸으며, "어린이에게 경어를 사용하라"는 내용의 선전문 20만 장이 전국에 배포되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 속에서 민족정신을 계승하려는 지식인들의 전략적 움직임이었으며, 1927년 5월 첫째 주 일요일로 변경되기 전까지 5월 1일은 교육을 통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 중국 상하이: 5·30 사건의 전야

2.1 일본계 공장의 노동착취와 초기 파업

1925년 5월 1일 상하이 내 일본 소유의 면방적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는 2월부터 이어진 노사 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특히 5월 15일 일본인 감독이 파업 대표를 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영국 경찰은 시위대를 무차별 진압하며 13명을 사살했고, 이는 5월 30일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2.2 반제국주의 연대의 싹

상하이 학생연합회는 5월 1일 난징루에서 "외국인 철수"와 "불평등조약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날의 행진에는 3,000여 명이 참여했으며, "중국인의 중국을 위한 중국"이라는 구호 아래 청년 지식인과 노동자의 연대가 처음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후에 국공합작으로 발전하며 중국 근대사의 주요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3. 세계의 5월 1일: 노동절의 다층적 의미

3.1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동향

1925년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공동으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20만 명 규모의 노동절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시기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후 복구와 초인플레이션 수습에 집중하던 시기였으나, 나치당의 전신인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집회 주변에서 반공산주의 선전을 펼치며 세력 확장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3.2 미국의 노동권 확장

뉴욕에서는 미국노동연맹(AFL) 주도로 5만 명의 노동자가 8시간 노동제 법제화를 요구하며 맨해튼 5번가를 행진했습니다. 특히 흑인 노동자들이 백인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이 행진은 인종차별 철폐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1925년을 "미국 노동운동의 르네상스"로 규정하는 학자들의 해석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4. 1925년 5월 1일의 비교사적 분석

구분조선중국(상하이)독일미국

주요 행사 노농총동맹 파업, 어린이날 행사 반제국주의 시위 사회민주당-공산당 합동 집회 AFL 주도 대규모 행진
참여 규모 2,000여 명 3,000여 명 20만 명 5만 명
주요 요구 8시간 노동제, 일본 이민 반대 외국인 철수, 임금 인상 실업급여 확대, 공장 국유화 최저임금제, 인종차별 철폐
탄압 수위 50명 검거 영국 경찰의 발포 나치 준군사조직의 방해 공작 경찰의 최루탄 투척
역사적 영향 1926년 6·10 만세운동 기반 5·30 사건으로 전개 1933년 나치의 메이데이 장악 1935년 국가노동관계법 제정
 
 

5. 타임라인: 1925년 5월 1일 전후의 사건

날짜국내 사건국제 사건

4.17 조선공산당 창당 상하이 일본공장 파업 시작
4.30 일제, 5.1 집회 금지 포고 영국 상하이 경찰 증파
5.1 노농총동맹 파업, 어린이날 행사 상하이 반제 시위, 독일 대규모 집회
5.15 - 일본인 감독의 노동자 살해
5.30 - 상하이 5·30 사건 발발
6.10 순종 장례식 중국 전역 시위 확대
 
 

6. 1925년 5월 1일의 역사적 의의

이날의 사건들은 식민지 조선과 반식민지 중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1920년대 세계사의 축소판을 보여줍니다. 조선에서 노동절과 어린이날이 결합된 것은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의 이중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냈으며, 상하이의 움직임은 아시아 차원의 반제 연대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특히 1925년은 국제연맹이 제국주의 질서를 공식화한 시기임에도, 이날의 사건들은 그러한 체제에 대한 도전이 전 지구적으로 분출하고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방정환의 어린이날 운동이 "미래 세대를 통한 문화적 저항"을 표방한 반면, 조선노농총동맹의 투쟁은 직접적 정치적 대결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 사회의 다층적 저항 전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복합성은 1926년 6·10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계승되어 일제 말기 항일투쟁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7. 결론: 과거와 현재의 대화

100년 전 오늘의 사건들은 오늘날 노동권 투쟁, 아동 인권 보호, 반제국주의 운동 등 현대적 쟁점들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특히 1925년 5월 1일 조선과 상하이에서 동시에 전개된 움직임은 약소국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21세기 신식민주의에 맞선 글로벌 연대의 교훈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 속의 이날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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